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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달마대사의 생애

^^고박사 2018. 2. 14. 14:53

 

 

달마대사(達磨大師)의 생애

 

 

 

보리달마는

남인도 향지국의 셋째 왕자로 태어나

성을 세테이리라고 했다.

 

또한 달마는

인도가 아닌 페르시아 출신이라고도 하며,

 

찰제리고 하는 것은 성이 아니라

인도 4성계급 중에 크샤트리아를 의미한다고도 한다.

 

 

어느 날 '반야다라'라고 하는 고승이

 

널리 가르침을 베푼다는 말을 듣고

국왕은 그를 왕궁으로 초청하였다.

 

국왕은 반야다라의 가르침을 받고는

 

왕에게 광채가 나는

보석을 공양하고 신자가 되기로 하였다.

 

한편 왕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은 '월정다라'라고 불렀으며,

염불삼매의 행을 닦았다.

 

둘째는 '공덕다라'라고 하는데,

백성에게 봉사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다.

 

셋째는 '보리다라'라고 불렀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해석하는 데 뛰어났다.

 

 

이에 반야다라는 세 왕자의

지혜를 시험해 보기 위하여 질문을 던졌다.

 

"이 세상에서 이 보석보다 더 훌륭한 것이 있겠습니까?"

 

월정다라가 대답하였다.

 

"이 보석은 우리 나라의 보물입니다.

 

이 세상에 더 훌륭한 것이 있을 리 없습니다.

" 공덕다라 역시 비슷한 말을 하였다.

 

 

그런데 보리다라가 말하길,

 

"스승님, 이런 보석은

감히 최상의 보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보물은 가지고 있는 사람만을 기쁘게 할 뿐 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가는 보물은

여러 가지 법 중에서 부처의 가르침이고,

 

사람이 지닌 뛰어난 여러 가지

능력 중에서는 지혜가 가장 두드러집니다.

 

그리고 지혜 중에서는

마음의 지혜가 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 가지 보물이 가장 훌륭할 것입니다."

 

반야다라는 그가 큰 그릇 임을 알고 크게 칭찬하였다.

 

 

 

얼마 후에 국왕이 승하하자

 

보리다라는 반야다라를 따라

출가하여 불법을 배우게 되었는데,

 

이에 이름을 '보리달마'라고 하였다.

 

달마가 스승 밑에서 수행하기를 40여 년,

 

반야다라는 임종에 이르러

달마에게 유언을 남기며 입적하였다.

 

"내가 죽은 후 67년이 지나면

동쪽 중국이라는 나라에 가서 전법하도록 하여라.

 

남쪽에 머무르지 말고,

네가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북쪽으로 가도록 해라."

 

 이에 달마는 훗날

스승의 명을 받아 중국이라는 나라로 향하게 된다. 

 

 

470년 무렵

중국에 건너와서 선종을 퍼뜨렸다.

 

 

불교를 깊이 믿고 있던

양의 무제와 선문답을 하기도 하였다.

 

520년 전후에 북위의 도읍 뤄양에 갔다가

 

그 후 허난 성 숭산 소림사에서

좌선수행에 정진하고

그 선법을 혜가 등에게 전수하였다.

 

달마의 전기에는 분명치 않은 점이 많다.

 

당송 시대 선종의 발전과

더불어 그의 전기가 추가,

 

보완되어 선종의 1대조로서의 달마상이

역사적 사실과는 별도로 확립되게 되었다.

 

 

 

양 무제와의 문답에 관한 이야기,

 

 

혜가가 눈 속에서 팔을 자르고

법을 전수받았다는 이야기,

 

서역에서 서쪽으로 돌아가는

달마를 만나보았다는 이야기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권릉가경을 중시하고 2입

4행의 가르침을 말하고,

 

북위 말기의 귀족적 가람 불교와

수행체험을 도외시한 강설 불교에 대하여

날카로운 비판을 가한 일,

 

중생의 동일진성을 믿고

선의 실천수행에 노력한 것 등은 사실로 인정된다.

 

제자에는 혜가·도육·승부·담림 등이 있다.

 

 원각대사라는 시호를 당나라 중기에 받았다.

 

 

6세기 초 서역에서

화베이로 건너와 뤄양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종래에는 11세기에 정리된 전승설화 외에

전기나 사상 등이 불분명하였으나,

 

20세기에 들어와 둔황에서 발견된 어록에 의해

 

벽관으로 일컬어지는 독자적인 선법과,

제자들과의 문답이 확인되어 그 실상이 밝혀졌다.

 

 

그 시대의 불교가

번쇄한 철학체계에 기울어진 가운데,

 

벽이 그 무엇도 접근시키지 않듯이

본래의 청정한 자성(自性)에 눈떠

 

바로 성불하라는 설법을

평이한 구어로 말한 종교운동가였다.

 

 

 

8세기부터 9세기에 걸친

급격한 사회변혁 시대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새 불교의

이상을 달마에게 구하였다.

 

불립문자 교외별전

(문자·언어·경전에 의해 전해지는 것이 아닌

사제의 마음에서 마음으로 직접 전해진다.

 

직지인심. 견성성불

(바로 자기의 마음을 파악함으로써

 

자신이 본래 부처였음을 깨닫는 것)의

4구절에 그 교의와 역사가 집약된다.

 

달마는 부처로부터 28대 조사이며,

정법을 전하기 위하여 중국에 건너왔다.

 

 

남해를 건너 남조의 양나라에 이르러

불교학의 최고봉 무제와 문답했으나

 

정법을 전하는 데에는 부족하다 하여,

비밀리에 북위의 쑹산 소림사에 들어가 후에 구하였지만

 

승낙을 얻지 못하자 한쪽 팔을 잘라

진심을 증명한 설화와, 저는 마음이 불안합니다.

 

제발 제 마음을 가라앉혀 주십시오

그대의 불안한 마음을 한 번 내게 보여주지 않겠나,

 

그래야 가라앉혀 주지

그건 어디를 찾아봐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나는 지금 그대의 마음을 가라앉혀 두었네

라고 하는 혜가와의 안심문답이 유명하다.

 

달마의선의 특색은 이러한 대화의 어기에 있으며

마침내 사람들은 조사서래의를 묻게 되었다.

 

이 문답이 선종의 모든 것이다.

 

 

 

인도의 왕자였던 달마대사는.

(혹자는 페르시아나네팔이라고도함)

 

굉장히 잘생긴 외모를 갖고 있었으며

매우 총명하였다고 한다.

 

수도승이 된 달마는

종교적인 지식뿐만 아니라

 

무예에도 조예가 깊었고

유체이탈의 경지까지도 가능했다고 한다.

 

인도에서 수행을 한 달마는

큰 뜻을 품고 중국으로 가게된다.

 

가는 도중에 악귀에게 속아서

 

유체이탈을 하게 되는데

 

돌아와 보니

육신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달마는 사용 가능한 육신을 찾아서 헤매다가

방금죽은 행려병자의 몸을 발견하고

그 몸안에 들어가게된다.

 

달마는 그 몸을 갖고

중국에 가서 남은 일생을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중국에 도착한 달마대사는

소림사에 들어가서

깨달음을 얻고 중국에 대승불교를 전파한다.

(참고로 소림사의 무술도 달마대사가 만든 것이다.) 

 

 

생사를 초월하는 달마 대사 

 

중국 땅에 처음

선법을 전달한 달마 대사는

선종의 시조로서 그에 관한 일화가 많이 있다.

 

달마 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간 것은

 

부처의 법 중에 선법을

 전하고 중생을 제도하려고 한 것

 

달마대사는

선의 경지가 매우 높아서

 

생사의 경계를 초월해

보통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예사로 해냈다고 한다..

 

 

달마 대사가

천산 산맥을 넘어 인도에서

 

중국으로 갈 때

앞을 가로지르는 강물을 만났다.

 

아무리 살펴봐도

부근에는 배도 없고 인가도 없었지만

 

달마 대사는 태연히 물위를

걸어서 강을 건너 중국 땅으로 갔다.

 

 

출처 : 고우니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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