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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길상사에서 만난 `자야`와 `백석`

^^고박사 2017. 10. 19. 08:55
길상사(吉祥寺)에서 만난 자야(子夜)와 백석(白石)

                         - 평생을 가슴에 녹여온 사랑, 그 순수의 마음으로

                           금준미주(金樽美酒)의 터가 절집으로 바뀌어 새소리 바람소리 들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길상사 큰 법당, 양반집 안채 같은 모습으로 편안하다

길상사는 1987년 창건주인 김영한(법명 吉祥華)불자님이 
미국 LA '고려사'에서 대도행보살님 주선으로  요정이던 ‘대원각`을 
법정 스님께 기증할 뜻을 밝히고 1995년 6월 13일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 말사 대법사로 등록을 마쳤으며 
1997년 2월 14일 총무원에 대법사에서 '길상사'로 개명하고 지금에 이르는 절인데 
내가 여름 초입 길상사(吉祥寺)를 찾았던 이유는 두가지이다.
하나는 아비규환의 속세 터 중 가장 질펀한 곳, 
금준미주(金樽美酒)의 터가 절집으로 바뀌어 
계곡과 그 속의 비밀스런 방들이 어떻게 맑은 물소리, 바람소리 흐르는 곳으로 변하였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큰 법당 뒤켠의 작은연못, 길상사 여름


다른 하나의 이유는 '대원각'이었던 그 집 주인인 김영한 할머니(법명: 吉祥華)께서 
어떻게 선뜻 그 재산을 기증하여 미련없이 절집으로 만들었는가?에 
대한 세간의 관심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딴은 그것만이 이유가 아니였다
30년대 우리 문단에서 황토색 짙은 서정으로 문단에 큰 족적을 남긴 백석과의 사랑, 
순수함을 평생간직한 올곧은 여인으로서의 길상화,
백석에 의해 자야(子夜)로 불리운, 백석에게서 단 하나의 여인이었고 자야에게서 
단 하나의 남자였던 백석의 사랑을 느껴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김영한은 1916년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나는데 
1932년 그녀의 집안은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어 
거리로 나앉게 되고 
이때 김영한은 열여섯 살의 나이로 조선 권번(券番)에 들어가 기생이 된다. 
기명(技名)은 진향(眞香). 
그는 조선 권번에서 조선 정악계(正樂界)의 대부였던 하규일 선생 문하에서 
여창가곡, 궁중무 등을 배운다. 문재(文才)를 타고난 김영한은 기생 생활 중에도 
‘삼천리문학’에 수필을 발표하며 인텔리 기생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백석은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백기행(白夔行). 1929년 오산고보를 졸업하고 
도쿄로 건너가 아오야마 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했으며 조선일보에 시를 투고 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하였고 함흥 영생여고보 영어교사로 부임을 한다

길상사 일주문


1935년 기생 김영한의 능력을 높이 샀던 조선어학회 회원 
해관 신윤국의 후원으로 일본 유학을 하여 도쿄에서 공부하던 중 신윤국이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한다. 김영한은 함흥에서 스승의 면회를 시도했으나 
면회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함흥에 눌러 앉는다. 
그는 고민 끝에 다시 함흥 권번으로 들어가는데, ]
다시 권번에 들어가게 된 이유는 기생이 되면 큰 연회에 나갈 기회가 많고 
자연스럽게 함흥 법조계 유력인사를 만나게 되면 
스승을 특별면회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것 때문이었다고 한다
진향은 끝내 스승 신윤국을 면회하지 못했지만 함흥 영생여고보 영어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백석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진향은 함흥 영생여고보 교사들의 회식 장소에 나갔다가 백석을 만난다. 
백석은 진향을 옆자리에 앉히고 손을 꼭 잡고는 이렇게 속삭였다고 한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

길상사를 찾아드는 여름 성북동의 넓은 골목에는 커다란 저택들이 나를 압도했지만 
길상사 즈음에서는 매미소리와 새소리로 가득했고, 
들어가는 일주문과 왼켠의 키 큰 나무 한그루는 
영락없는 절집으로 보기에 손색이 없었다
단청이 없는 큰 법당, 절집의 모습은 옛날 기호지방의 
양반집 안채같은 모습에 다름 아니었다
팔작지붕의 'ㄷ'자형 모습은 일부러 예전의 요정 모습을 숨기려 하지 않은채, 
너른 마당을 앞에두고 편안히 부처님을 모신 곳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쩌면 도심곁의 공원같기도 하여 오히려 절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편안히 다가설 수 있게 하는 공간이었다


길상사 요사채

그때 백석의 나이 스물여섯, 김영한의 나이는 스물둘. 
백석은 퇴근하면 으레 진향의 하숙집으로 가 밤을 지새곤 했다. 
어느날 백석은 진향이 사들고 온 ‘당시선집’을 뒤적이다가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를 발견하고는 
그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준다. 
‘자야오가’는 장안(長安)에서 서역(西域) 지방으로 오랑캐를 물리치러 나간 낭군을 
기다리는 여인 자야의 애절한 심정을 노래한 곡이다
하늘에 맺어준 여인에게 ‘자야’라는 아호를 붙여준 것은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당신은 두 사람의 처절한 숙명이 정해질 어떤 예감에서, 혹은 그 어떤 영감에서 이 
‘자야’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던 것은 아닐까.
조분조분 하얀 창호지를 바른 문에는 아침 햇살이 들고, 몇 몇 불자들이 뭔가를 
기도하는 도량은 딱히 지나치게 엄숙하지 않아도 충분히 경건하게 느껴졌고 
온갖 나무들과 능소화, 원추리, 붓꽃등 붓꽃들이 하나하나 불심을 느끼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적요(寂寥)함이 그늘을 드리우며 큰 법당 옆으로 
흐르는 작으나 깊은 계곡에는 물이 흐르고, 
계곡을 둘러싼 숲 속으로 요사채들이 하나하나 얼굴을 내민다.


길상선원, 저곳도 언젠가는 술청이었으리라

두 사람의 사랑은 뜨거웠지만 봉건적인 시대 환경에서 볼 때 
백석의  고향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강제로 백석을 자야에게서 떼어놓을 심사로 혼인을 시키기로 한다. 
백석은 부모의 강요에 의해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가 정한 여자와 혼인을 올리지만 
손목 한번 잡아보지 않고 도망쳐나와 자야 품으로 돌아온다
이런 식으로 강제 결혼을 하고 다시 도망치기를 세 차례. 
자식으로서 부모에 대한 효심과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고 싶은 열망 사이에서 
백석은 괴로워하고 갈등한다. 
백석은 봉건적 관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야에게 만주로 
사랑의 도피를 하자고 설득하지만 자야는 이를 거절한다. 
백석은 글 처음에 올린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에서 당시의 심경을 노래한다
술의 힘을 빌어 낮은 소리로 무엇인가를 모함하고 계략하고 거래를 하던 곳, 
기생들의 노래가락으로 갉아먹은 정신을 추스리지 못하고 그냥 육욕에 사로잡힌 영혼들이 
웃고 울고 떠들던 으슥하고 독립된 술청 하나하나가 지금은 스님들이 
공부하고 염불하여 이승의 악업들을 천도하는 요사채로 바뀌어져 있었다
절집 뒤켠 저 중간에 위치한 길상선원(吉祥禪院) 들어선 
그 곳에서 뒤로 나가는 문과 길은 좁다
어쩌면 악업을 지으려는 것에 두렵고 양심에 떨려 앞문으로 못들어 오고 예전 
'대원각'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중에는 이 길을 택한 이들도 있었으리라


길상사 마당에서 목을 축이고 마음씻다

1939년 백석은 혼자서 만주 신경으로 떠나는데, 
이것이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1942년 백석은 만주 안동에서 잠시 세관업무를 하기도 했는데, 
조국이 광복을 맞은 후 고향 평북 정주로 돌아와 1948년 잡지 ‘학풍’에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이라는 시를 발표한다. 이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씁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이 작품이 백석이 서울에서 발표한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백석이 월북한 적이 없었음에도 
‘월북작가’로 분류된 까닭은 남북으로 분단되었기 때문이다. 
서울과 함흥과 정주를 마음대로 오가며 문학활동을 하던 백석은 한반도의 허리가 잘리면서 
자의와 무관하게 북쪽을 선택한 결과가 되었다. 
월북작가가 아닌 재북작가였음에도 우리의 기억속에서 
한동안 지워졌던 이름 백석은 나중에 이르러 
김영한, 자야(子夜)에 의해 다시 우리 앞에 서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그 곳도 만발한 한련이나 뭇 꽃들이 길들을 수놓고 있지만 
예전의 그 꽃들은 그런 이들을 맞으면서도 
웃음과 교태를 짓는 분칠을 한 모습이었을지 모르고, 같은 모습이지만 
지금저 꽃들은 이곳을 찾는이들에게 천박한 웃음대신 
합장하며 맞을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을 한다
돌아 다시 내려온 절마당에서 졸졸졸 흐르는 물한모금 마신다.
절에서 모든 것들은 세번을 씻는다
씻고 닦고 헹구는 일이 절집에서 행하는 모든 것일지도 모른다.
마음이거나 몸이거나 하다못해 발우공양한 그릇하나 조차도


길상사 관세음 보살상

생전의 김영한은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이 되면 하루 동안 일체의 음식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사랑하는 연인 백석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을 그렇게라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노년의 자야는 백석의 시를 조용히 읽는 게 가장 큰 생의 기쁨이었다 한다. 
자야는 ‘내 사랑 백석’에서 
“백석의 시는 자신에게 있어 쓸쓸한 적막(寂寞)을 시들지 않게 하는 
맑고 신선한 생명의 원천수였다”고 술회한다. 
김영한은 1997년 창작과비평사에 2억원을 출연해 ‘백석문학상’을 제정하도록 했다. 
시집을 대상으로 한 백석문학상은 1999년부터 수상작을 발표하는데 
황지우, 최영철, 신대철 등이 수상 시인들이다.
물먹는 나를 저기서 물끄럼히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
관세음보살,,,화강암 곱게 다듬어 생명을 입힌 관세음 보살이시다.
길상사 개원 법회에 같이 자리하셨던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이 보살님을 보고 성모마리아를 닮았다고 하셨다던가?
또한 성모마리아나 관세음보살 그 무엇이면 또 어떠냐는 말씀을 하셨다던가?


길상사 범종루 지붕에도 연륜이 쌓여간다
 
백석을 안다면 내가 그이 부모 다음일 거야. 
그의 하트(heart)) 틀 아니까, 
그런데 다 없어졌어요.
" 내 탓입니다. 
미스터 백은 자식도 낳고 결혼도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총각이 기생과 결혼하면 
남자 집안이 망하던 세월이야
그래서 나는 당신 첩, 소실이나 될래요- 했지요. 
거기서 실망한 거야
"사랑을 버려도 괜찮아? 말 다한 사람이군" 하면서 떠났어요. 
"50년 만에 담배를 끊었는데 
니코틴보다 더 그리운 사람이 그 사람이지요
"종교에서는 사람이 죽어도 
영혼은 살아 있다는데 난 영혼을 안 믿어요.
꿈에 그 사람 늙은 모습은 안 나오고 
60년 전 인생이 나와요.
               38선이 터지면 기어서라도 가서 산소를 찾을 거예요 "
         
바람들고 볕들어 마음자리 풀어놓자
어리석은 백성인 내가 보기에는 
그 관세음보살에서 때로 능인행(能仁行)이란 법명을 가지셨던 
나의 어머니의 모습을 본다.
아니면 이 절집을 만든 길상화(吉祥華), 자야(子夜)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음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제 하기에 따라서는 누구든 저런 모습 보일 수 없음이랴?
출처 : 맘스쿨114
글쓴이 : 수현당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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