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는 몇 년전 홀연히 떠났다. 검은색 이민 가방 몇 개를 싸들고 태평양을 건넜다. ‘헬조선’ 뭐, 그런 말이 생기기도 전이었다. 그냥, 어느날, 모든 걸 버리고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꿨을까?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공정한 경쟁과 기회를 기대했다고 기억했다.

그런 그가 이민 생활에서 처음 겪은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바보가 됐다는 느낌이라고 했다. 나름 한국에서는 배울만큼 배우고, 제법 스마트하다는 소리도 들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핸드폰 개통, 인터넷 설치…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었다. 차량국(DMV), 사회보장국 같은 곳에서는 하위직 공무원들의 싸늘한 냉대와 무시(그만의 느낌이었겠지만)에 치를 떨기도 했다. 하지만 누굴 탓하랴. 어눌하고 버벅대는 영어에, 불안정한 신분(status)까지. 뭐 하나 내세울게 없었으니 말이다.

김현수가 25타석만의 첫 안타를 치고 1루를 향해 혼신의 질주를 펼치고 있다. mlb.tv 화면

살벌한 AL 동부지구, 위협적인 주변 환경  

이건 뭐, 플레이오프나 한국시리즈의 한 장면 같았다. <…구라다>는 그가 그렇게 치열하게, 온 힘을 짜내 열심히 달리는 모습을 본 적이 처음이다. 이를 악물고, 1루를 향해 전력질주 하는 그 순간은 마치 올림픽 100미터 결승을 질주하는 스프린터의 표정이었다. 공이냐, 발이냐.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1루심은 ‘세이프’ 시그널을 보냈다. 25타석만에 드디어, 첫 안타가 기록된 순간이다.

그는 KBO리그에서 가장 잘 치는 타자였다. 파워는 박병호에 비해 달리지만, 정확성과 기술적인 면에서는 거의 완성된 선수로 인정받았다. 물론 여러 번의 국제 무대에서도 입증된 실력파다.

그런 그가 미국 진출 초반 시범경기에서 절절매고 말았다. 무려 7경기, 21타석 동안 허탕이었다.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취재하던 (미국) 기자들은 무안타가 이어질 때마다 SNS에 글을 올렸다. ‘또?’ ‘저런!’ ‘역시’ 등등의 조롱섞인 멘션이 주를 이뤘다.

무안타 기록이 길어지면서 주변의 평가도 냉정해졌다. 벅 쇼월터 감독은 비수같은 한 마디를 던졌다. “메이저리그는 냉정한 곳이다. 잘해야만 계속 북쪽에서 뛸 기회를 얻을 것이다.” 북쪽이란 볼티모어, 즉 ML을 말한다. 그들의 마이너리그 팀 노포크는 남쪽에 있다.

현지 언론도 마찬가지다. 유력지인 <볼티모어 선>은 연달아 마이너행을 암시하기도 했다. 마이너리그 거부권 탓에 구단도 섣불리 개막 로스터에 포함시키기 부담스러울 것이라는 예측도 나왔다. 초반에 친 안타 2개는 무시당하기 딱 좋았다. <볼티모어 선>은 “그다지 대단하지 않은 2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했다. 이날 경기로는 신뢰를 거의 얻지 못했다. 그의 타구는 원래 실책으로 기록돼야 했지만 안타로 정정됐다”며 평가 절하했다.

그가 속한 아메리칸 리그 동부 지구는 살벌한 곳이다. 냉정한 쇼월터 감독이 마치 그렇게 묻는 것 같았다. “너, 혹시 박찬호나 윤석민이랑 친하니?”  

김현수가 첫 안타를 치고 덕아웃으로 돌아온 뒤 통역과 함께 멋적은 웃음을 짓고 있다. mlb.tv 화면

“혼란의 시간은 더 허락돼야” 

개막 초반 깊은 부진에 빠져 타석에서 허둥거리는 그를 보면 이미 초창기의 A가 연상된다. 물론 연봉 280만 달러나 되는 그에게 ‘이민(移民)’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 지 모른다. 그 단어에는 왠지 고달픔, 외로움, 서글픔이 묻어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현수가 어느 매체와 인터뷰에서 토로한 심정을 보면 비슷한 심경을 읽을 수 있다. “수비와 공격 모두 내가 아닌 것 같다. 이제 막 야구를 시작한 꼬마가 된 것 같다.”

그런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CBS 스포츠 베테랑 기자인 스티브 스미스는 이렇게 묘사했다. “코치, 동료, 호텔 직원, 웨이터, 팬들을 상대할 때 사소한 대화조차도 통역을 거쳐야 한다. 생전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투수들과 상대해야 한다. 그에게 혼란의 시간은 더 허락돼야 한다.”

 

당구장의 절대 명언 “플루크 다음은 장타” 

조재호라는 당구 선수는 국내 무대에서 랭킹 1,2뤼를 다투는 최강자다. 하지만 한동안 국제무대에서 성적을 내지 못했다.

그러던 그가 2년전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린 3쿠션 월드컵 대회 결승에 진출했다. 상대는 역시 한국 선수인 최성원. 라이벌인 최성원은 조재호를 압도하며 40점에 먼저 도달했다. 이때 조재호의 점수는 32점. 남은 후순위 한 번의 공격 기회에서 나머지 8점을 얻지 못하면 승부는 끝나게 된다.

이 때 기적이 일어났다. 조재호가 한 큐에 8점을 몰아친 것이다. 그리고 결국 승부치기에서 3-2로 이겼다. 생애 처음 세계대회 우승을 차지한 그는 어린아이 같이 눈물을 펑펑 쏟았다.

특히나 화제가 것은 마지막 8점 중 6번째 득점이었다. 바깥 돌리기가 빠져나가면서 실패하는 순간, 1적구와 키스(쫑)가 나면서 행운의 득점으로 연결된 것이다. 끝난 줄 알았던 최성원은 일어나려다 멈칫했다. 관중석에서는 열렬한 환호가 터져나왔다.

동네 당구장에서는 그런 걸 ‘후로꾸’ ‘뽀록’ 등의 전문용어(?)로 부른다. 마치 일본어 같지만 사실은 엄연한 영어다. 플루크(fluke). 요행, 요행수라는 뜻이다.

야구에서도 비슷하다. 김현수가 처음 친 2개의 안타는 당구로 치면 플루크 샷이다. 평범한 내야 땅볼이었지만 운(運)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물론 기술적으로 높이 평가할만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야구는 결국 ‘평균에 수렴하는 경기’다. 행운의 안타가 있다는 건, 잘 맞았지만 라인드라이브로 잡히는 경우가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그게 반전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결국 그는 오늘(14일)에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안타를 쳤다. 희생플라이로 타점도 하나 올렸다. 최근 6타수 3안타다.

삐딱하던 현지 언론에는 ‘타격 기계’ ‘예열’ 같은 단어가 등장했다. 비로소 우호적인 반응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 정도면 동네 당구장에 전설처럼 떠도는 명언이 하나 생각난다. ‘플루크 다음에는 장타(다득점).’

 

백종인 / 칼럼니스트 前 일간스포츠 야구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