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후기

용봉산

^^고박사 2010. 10. 19. 07:03


2010-11-21 충남의 금강 용봉산과 천년고찰 수덕사

홍성에 위치한 용봉산은 높이는 낮지만 주변 전경이 수려하고 기암괴석이 수석처 같다.

바위산 답게 기암괴석이 기기묘묘한 형상을 빚어 여느 명산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는다.

용봉산은 충남의 소금강이라 할만큼 암봉미가 뛰어난 멋진산이다

1973년 가야산(678m)·덕숭산(495m) 등과 함께 산 일대가 덕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덕산온천은 온양·도고 방면으로 이어지는 온천지대에 속한다.
온천수는 pH 8.7로 알칼리성이며, 규산·나트륨·칼슘·마그네슘 이온 등을 함유한다.
평균온도는 45℃이며, 5개의 천공(泉孔)이 있다.
하루에 1,500t 가량 용출된다. 목욕물은 물론 식수로도 이용되며,
류머티즘·부인병·소화기질병, 각종 피부병 등에 효과가 크다.
조선시대 이율곡도 효능이 탁월한 온천수로 소개했다

 



용봉사는 백제시대 때 창건됐다고 전하는 유서 깊은 사찰인데 절마당에 들어서면 고색창연해야 할 당우는 간 데 없고,
축대마저도 새로 쌓은 듯 회색빛이 선명하다. 알고 보니..
용봉사도 2대에 걸쳐 황제가 배출된다는 가야사 절터에 남연군 묘을 이장하기위해
대원군에 의해 폐사된 가야사처럼 불태워진 수난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광무 9년(1905) 평양 조씨 일가가 명당으로 알려진 용봉사 터에 묘를 쓰기 위해 폐사시켰던 것이란다
다행히 절이 폐사된 것을 안타깝게 여긴 마을 주민들이 이듬해 원래 위치에서
동쪽으로 절을 옮겨 지어 법등을 겨우 이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닭 볏만도 못한 권력을 맹종하는 권력지향성과 자신의 이념 외의 것을 인정치 않으려는 사상적 폐쇄성이
민족의 문화유산이자 민중들의 귀의처였던 사찰을 훼철시킨 동력이었겠지요.
문뜩 진리를 바로보지 못하고 가야사를 불태운 대원군이나 용봉사를 폐사시킨 조씨 일가가 측은해진다
밑의 묵은 부도는 왕후장상에게 무상함을 일깨우는 수행자처럼 용봉사를 찾는 이들에게
진리의 영원함과 권력과 욕망의 속절없음을 가르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말 숭제법사가 창건하고 고려 공민왕 때 나옹이 중수했다고 하며,
일설에는 백제 599년에 지명법사가 창건하고 원효가 중수했다고도 한다.




 


국보 제 49호 수덕사대웅전 석가모니 불상을 모셔 놓은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 (1308년)에 지은 건물로
지은 시기를 정확하게 알수 있는 우리나라에서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대웅전 : 대웅보전이라고도 한다. 사찰의 중심이 되는 전당으로,
도력과 법력으로 세상을 밝히는 영웅을 모신 전각이라는 뜻이다.

 

<삼세불좌상..대웅전 내부의 중앙에는 석가모니불 약사불 아미타불 등의 3세불 좌상이 봉안되어있다
이러한 3세불은 전란을 겪은 조선후기에 많이 나타나는데 사회 혼란과 무병장수을 염원하는 신앙






이 여관은 이응로 화백의 본 부인이 이화백에게 소박 맞고 평생을 홀로 외로이 지내면서 생계를 유지한 여관이지만
지금은 이곳 바위에 새겨진 이화백의 문자암각화만이 세인의 관심거리가 되고
정작 본부인의 한맺인 일생을 상기할 그아무것도 남아있지않는 아쉬움이 있다



1968년 이응로 화백이 동백림에서 끌려와 투옥되자 대전-전주 교도소로 따라다니면서 1년동안이나 옥바라지 한사람은 " 부모가 억지로 맺어준 사랑없는 결혼" 이라는 이유만으로 바로 자기가 일방적으로 버린 그의 본부인이자 수덕여관 주인이였던 것이다




출소후 그는 이곳에 "1969년 이응로 그리다" 라는 낙관을 새긴 암각화를 남기고 후처가 있는 파리로 훌쩍 다시 떠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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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의 여승"에 얽힌 일화> ((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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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의 여승 - 송춘희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아 ~ ~ 수덕사에 쇠북이 운다
산길 백리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염불하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맺은 사랑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아 ~ ~ 수덕사에 쇠북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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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의 여승"에 얽힌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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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중반 발표되어 꽤나 힛트한 대표적 대중가요다.
속세에 두고 온 애절한 사연을 잊지
못해 흐느끼는 비구니가 그려지는 조금은 단조로운 가사내용이다.

그런데, 당대의 사람들은 이 애절한 비구니의 사연을 어떻게 받아들였기에
그처럼 큰 반향 을 일으키며 힛트할 수 있었을까? 그런 애절한 사연이 있을법한 수덕사 여승의 실제 모델은 있었을까? 있었다면 그는 누구일까? 이야기는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 때,
시대를 앞서간 신여성 세분이 있었으니, 우리나라 최초 의 대중가요로
불리는“사의 찬미”로 너무나 유명한 윤심덕이
그 한명이요,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화가이며 문장가인 나혜석이
그 한명이고, 나머지 한명은 시인으로 유명한 김일 엽이다.

이 신여성 세 사람은 조선사회 남존여비의 실체가 그대로 존재했던
시기에 시대의 요구를 단 호히 거부하고 불꽃처럼 살며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건 여인들이다.
나혜석은 사랑에 버림을 받고, 윤심덕은 현해탄에서 사랑과 함께 했으며,
김일엽은 스스로 사랑을 버린 여자다.
윤심덕과 나혜석의 이야기는 다음기회에 더 하기로 하고
여기선 실제로 수덕사의 여승이었으 며 한국 비구니계의
거목으로 추앙받는 김일엽의 이야기를 해보자. 김일엽의 본명은 “김원주”다.
일엽(一葉)이란 필명은 춘원 이광수가 그녀의 아름다운 필체에 반해 지어준 이름이다.
그런 사연 때문인지 둘 사이의 스켄들이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으며
연애대장이라는 별명 을 들을정도로 자유 분망하게 살아갔으며
진취적인 자신의 삶을 여성운동으로 승화시켜 “자 유연애론”과 “신정조론”을 주장하게 된다.
그녀가 80몇년전에 주장했던 신 정조론을 살펴보자.
“남녀가 서로 사랑을 나누었다는 것이 문제될 것은 없다.
정신적으로, 남성이라는 그림자 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여인이라면 언제나 처녀로 재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여인을 인정 할 수 있는 남자라야 새 생활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여인,
그것이 바로 나 다.” 한마디로, 남녀가 나누는 육체적 사랑을 순결
또는 정조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 하다 는 이야기다.
당시 꽤 파격적인 주장으로 받아 들여졌지만
작금의 세태에 비추어 보더라도 앞서가는 신세 대의 사고방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모든 여성들이 그러했듯이
그녀도 극심했던 남존여비(지금도 그러하지만)라는 잘못된
인습의 피해자 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몸소 겪었다.
부모의 중매로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남자와의 결혼하는데
남자가 의족을 한 장애인 이었 다.
남자가 이 사실을 숨겼으므로 지금이라면 사기 결혼을 당한 셈이다.
신뢰에 기반 하지 못한 결혼생활은 일찌감치 청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녀의 생활은 더 더욱 자유 분망하 고 사랑하며 살아가게 된다.

김일엽은 한국최초 여자유학생으로 일본으로 유학하게 되는데
여기서 또 일본인 “오다 세이 조”와 운명적 사랑을 하게 된다.
오다 세이조는 아버지를 은행총재로 둔 일본최고 명문가의 아들이며
당시 규수제국대학생 이 였다.
남자 부모님의 반대로 결혼하지 못하고 헤어지는 아픔을 겪는데,
이때 둘 사이에 아들 이 하나 태어난다.
이 아들은 아버지 친구의 양자로 입적되어 자라나게 되며
이 사람이 한국 과 일본에서 인정받는 유명한 동양화가 일당스님이며 이름이 “김태신”이다.
일당스님은 지금도 김천의 직지사에서 활동 중이며 해방직후
김일성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김 일성 종합대학에 지금도 걸려있다 한다.

당시 그 일로해서 조총련계로 오해받아 작품 활동 에 고초를 겪기도 했다.
오다 세이조와의 사랑도 아픔으로 겪은 그녀는 곧, 일본에서 돌아와 수덕사의 여승이 된다.
자신이 추구하는 사랑이 세파에 으스러지는 아픔을 이겨내고,
또 다른 참 인생의 행로를 불 자의 길로 선택한 것이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 어린 아들이 수덕사를 찾아 왔는데 불자가 되였으니,
“속세에 맺어진 너와나의 모자인연은 속세에서 끝났으므로
더 이상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라” 하며 모질게도 모자의 정을 끊고자
이역만리 찾아온 어린자식을 절 밖에 재웠다 한 다.

이때 김일엽의 절친한 친구인 나혜석이 수덕사 밖에 있는
수덕여관에서 같이 지내며 어머니 처럼 자신의 젖가슴도
만져보게 하고 그림도 가르쳤다고 한다.
그때 흘리지 못한 눈물이 가 슴에 쌓여 해탈로 녹아내렸을까?

비구니로써 그의 인생이 한국 불교계에 큰 족적을 남길 만큼 성공적인 것은 우연이 절대 아니다.
가수이자 음성포교사인 “수덕사의 여승”의 주인공 송춘희씨를
기념하기위하여 절 앞에 있 는 주차장에 노래 기념비를 세웠으나
2-3일후 수덕사의 스님들이 이 기념비를 무너뜨렸다고 한다.

그 연유는 아마도 노래의 가사 내용이 스님들의 비위에 맞지 않았나 싶다.
그렇다 해도 중생을 구제하고 아픔을 함께 해야하는
스님들께서 속세의 작은 정표하나 가슴 으로 안아주지
못하는 처사가 못내 아쉽기만 한 것은 내가 불자가 아니어서 그런걸까?
일엽 스님께서 살아계셨다면 기념비는 어찌 되였을지 자못 궁금하기만 하다.

무심히 부르고 흘러버릴 대중가요일 뿐인
“수덕사의 여승”에 이렇게 딴지를 걸어 보는건,
이 노래가 만들어진 시기가 60년대이니 이때엔 일엽스님께서 수덕사에 살아 계실 때다.
단정할 수는 없으나 노랫말을 쓴이가 일엽스님의 인생을 안다면 아마도
그런 가사가 나왔음 직 하지 않은가.
이 글에 인용된 사실적 기록들은 일엽 스님의
아들 일당스님(김태신)이 최근 발표한 자전소 설
<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에서 발췌했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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